엇갈린 부부들

8화. 엇갈린 부부들 - 제 8화

겨울밤관찰자72026. 03. 28. 22:12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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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언어 모임에 다녀온 이후로 , 수잔나의 일상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 신경을 안 쓰면 지나쳤을 지 모르는 일이지만 , 내가 엘리나랑 밀애를 나누고 있어서 그런가 , 나는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 TV 를 보다가도 누군가랑 자주 카톡을 주고 받았고 , 이따금씩 빙긋 웃기도 했다 . 다른 친구들이나 어학원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내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만 떠올랐다 . 며칠 지켜보던 나는 밤에 수잔나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휴대폰을 열었다 . 비밀번호를 푸니까 메인 화면이 나왔고 , 카톡을 눌러 들어가 보았다 . 예상했던 것처럼 , 주혁과 함께 대화를 나눈 내역이 보인다 .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읽어보았다 . [ 수잔나 - 주혁아 , 퇴근하는 길에 차가 많으면 ‘ 퇴근길이 막혀요 ’ 라고 하면 돼 ?] [ 주혁 - 응 ! ‘ 막히다 ’ 라고 하면 돼 ] [ 수잔나 - 오 , 고마워 ! 근데 그 단어 말하니 다들 한숨 쉬던데 ? ㅋㅋ ] [ 주혁 - 퇴근길 막히는 거 다들 싫어하니까 ㅎㅎ ] [ 수잔나 - 그럼 ‘ 오늘은 막히지 않았어요 ’ 이건 맞아 ?] [ 주혁 - 응 , 완전 자연스러워 . 한국사람 다 됐네 ?] [ 수잔나 - 그렇게 말해주니 자신감 생기는데 ? 다음에도 더 가르쳐 줘 ] [ 주혁 - 좋아 , 그때는 좀 더 어려운 문장으로 알려줄게 !] 읽으면 읽을수록 , 이게 별거 아닌 대화라는 건 알고 있었다 . 정말로 언어 교환 , 표현 질문 , 가벼운 농담 몇 개 .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그런데도 조금 불쾌했다 . 왜 굳이 단둘이서 ? 참으로 아이러니한 감정이 아닐 수가 없다 . 나는 이미 엘리나와 몰래 섹스까지 했다 . 정작 먼저 시작한 건 나라는 걸 알면서도 막상 수잔나의 대화를 보니 찝찝함과 경계심이 동시에 올라왔다 . 마치 내 죄책감이 반사처럼 튀어나와 질투라는 이름으로 뒤틀려 나오는 느낌이었다 . 다음 날 , 큰 번역 건이 들어와서 회사는 바쁘게 돌아간다 . 감수팀에 서류 몇 장을 주고 오는데 , 주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 일 끝나고 술 한 잔 하자던 그 놈 말에 창밖을 본다 . 먹구름이 잔뜩 낀 채 , 세찬 비가 창문을 연신 두드린다 . 안 그래도 막걸리 한 잔 생각났던 터라 , 퇴근 후에 역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 파전과 어묵탕을 곁들여 마시는 막걸리는 꿀맛이었다 . 처음으로 주혁과 함께 하는 술자리 . 불륜녀의 남편과 마주하고 있으니 처음에는 되게 기분이 이상했고 , 어색하기도 했다 . 하지만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 우리는 같은 남자로서 공감되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 처음에 만났을 때는 말수도 적고 , 점잖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 술에 취한 주혁은 전혀 달랐다 . 더럽고 , 은근히 비뚤어진 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 그는 얼굴이 벌개진 채 ,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고 말했다 . “ 형님 . 저는 종종 그런 생각해요 .” “ 뭔데 ?” “ 결혼 생활 오래 가려면 , 남자는 가끔은 다른 여자 좀 맛봐야 한다고요 .” 나는 웃음인지 긴장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 “ 그게 말이 되냐 ?” “ 돼요 . 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 솔직히 형님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지 않아요 ? 남자는 다 그렇잖아요 .” 그 말에 잔을 들던 내 손이 잠깐 멈췄다 . ‘ 있지 . 나도 그러고 있지 . 그것도 네 마누라랑 .’ 속이 뜨끔했지만 , 표정만은 최대한 무덤덤하게 유지했다 . “ 뭐 , 충동이야 다들 있겠지 . 근데 결혼하면 조심해야지 .” 주혁은 픽 웃으며 잔을 또 채웠다 . “ 에이 , 형님 진짜 김빠지는 소리 하신다 .”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속 깊은 곳을 찔렀다 . 이 인간 , 뭔가 알고 하는 말인가 ? 아니면 그냥 취해서 헛소리 하는 건가 ? 나는 그의 잔을 채워 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 “ 엘리나랑 결혼 생활하는 게 힘들어서 그래 ?” 주혁은 주전자를 받아 내 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 “ 내가 엘리나를 사랑 안 하는 건 아니에요 . 근데 , 그게 꼭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런 사랑은 또 아니잖아요 . 형님도 알잖아요 . 오래 같이 살다 보면 부부간의 감정이라는 게 보통 정 ? 익숙함 ? 뭐 그런 걸로 바뀌는 거 .” “ 풉 , 흐흐 , 누가 보면 결혼한 지 몇 십 년은 된 커플인 줄 알겠다 .” 나는 비꼬듯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오랜 시간이라는 건 부부마다 느끼는 게 다를 것이니 . 그는 또 한 잔을 비우고 말을 이어갔다 . “ 엘리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 착하고 , 배려도 많고 . 근데 , 제 욕정을 오롯이 채워주기엔 솔직히 많이 부족해요 . 뭐랄까 , 너무 안정적이어서 재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 편하기는 한데 , 그 편안함만으로는 안 되는 게 또 있는 거죠 .” 나는 가만히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마음 한복판이 저릿해졌다 . 그의 말에서 나의 결혼 생활이 오버렙되었고 ,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가 대신해서 읊어주고 있는 듯했다 . ‘ 네가 그 지랄하는 동안 , 나는 네 아내랑 떡을 쳤어 .’ 그 생각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톡 , 하고 아프게 찔렀다 . 죄책감인지 , 우월감인지 , 경계인지 알 수 없었다 . 주혁은 마치 중요한 결론이라도 내린 듯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 “ 그래서 말인데요 , 만약에 엘리나가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운다가 들켰다 ? 음 ...... 그러면 기분은 좆나 더럽겠죠 . 상대 새끼는 반쯤 죽일지도 몰라요 . 근데 , 뭐랄까요 , 그 순간이 온다면 차라리 저는 더 풀릴 것 같아요 .” “ 풀린다고 ?” 내가 되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네 . 지금은 그래도 엘리나 생각해서 좀 조심하는 척은 하잖아요 . 근데 그 선이 무너지면 ? 저는 아마 대놓고 업소에 다니거나 다른 여자 만날 걸요 . 뭐 , 결혼 생활 깨지면 깨지는 거고 . 요즘 이혼이랑 돌싱은 낙인도 아닌데 , 흐흐흐 .” 나는 잔을 내려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의 말이 너무 위험하고 , 너무 솔직해서 , 오히려 현실적으로 들렸다 . 그리고 동시에 묘하게도 , 그의 그런 태도가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 왜냐하면 ....... 나도 이미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 처음 그와 마주한 술자리에서 이미 알 수 있었다 . 나 , 주혁 , 수잔나 , 그리고 엘리나 . 우리 넷의 관계가 이미 격랑 속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 그 끝은 당연히 비극이겠지만 뭐랄까 , 그 과정만큼은 정말 스릴 넘칠 것만 같은 , 미친 생각이 들었다 .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역 근처 오피스텔로 향했다 . 러시아 여자를 픽했고 , 1 시간 동안 신나게 욕정을 풀고 왔다 . 주혁과 작별 인사를 하고는 대리 기사를 불러 뒷좌석이 올라탔고 , 눈을 감는다 . 취기에 머리가 핑핑 도는 와중에도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 수잔나가 아닌 엘리나였다 . 주혁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그녀가 왜 그토록 외로움을 느끼는 지 알 수 있었고 , 안타깝기까지 했다 . 휴대폰 화면을 보며 망설이던 나는 조용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 신호가 두어 번 가다가 엘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 “ 경률 ! 어쩐 일이야 ?” “ 잘 있었어 ? 나 지금 주혁이랑 술 한 잔 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야 .” “ 어머 , 정말 ?” “ 응 .”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고 , 나는 숨을 길게 내뱉고 말했다 . “ 술 한 잔 마시니까 , 네 생각나더라 . 보고 싶네 .” “........ 나도 .” 엘리나의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 그 한 마디에 정말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 “ 오늘 많이 마셨어 ?” “ 좀 마셨어 .”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 예전처럼 들뜬 웃음이 아니라 , 마음 깊은 데서 조용히 올라오는 그리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 “ 저기 , 있잖아 .......” “ 응 ?” “ 주혁이 이번 주 주말에 친구들이랑 1 박 2 일로 놀러 간대 .” “ 그래 ?” “ 응 . 그래서 말인데 , 우리 볼 수 있을까 ?” 말끝이 떨렸다 . 필요해서가 아니라 , 정말 만나고 싶어서 묻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 “ 당연하지 .” “ 후훗 .” 엘리나는 다시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고 , 그 소리에 내 입가에도 조용히 미소가 번졌다 . 그리고 다가올 토요일에 있을 일을 상상하며 말을 이어갔다 . “ 제대로 데이트 한 번 하자 .” “ 그래 .” “ 나 집에 거의 다 왔어 . 들어갈게 . 잘 자 .” “ 너도 잘 자 . 그리고 .......” “ 응 ?” “ 나도 많이 보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고, 내 머릿속은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될 순간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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