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39화. 엇갈린 부부들 - 에필로그

겨울밤관찰자72026. 03. 30. 05:12 14
18px
호주에 온 지 1 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 멜번의 계절은 여전히 낯설었고 , 익숙해졌다고 믿었던 일상은 사실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흘러가고 있었다 . 나의 일상과 삶은 엘리나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 같은 집 , 같은 침대 , 같은 식탁 . 남들이 보기엔 안정된 동거였을지 모르지만 , 글쎄 , 그 시간동안 정말로 ‘ 행복하다 ’ 고 느꼈던 적은 많지 않았다 . 불행하다고 말하기엔 또 애매했다 . 그저 도피였다 . 한국에서 , 네 사람의 관계에서 ,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온 삶 . 엘리나에 대한 감정은 한국에서 느꼈던 것 이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 햇빛 아래에서는 분명히 보이는데 ,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았다 . * * * 평범한 토요일 오후 . 엘리나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 나는 식탁에 앉아 커피를 식히고 있었다 . 휴대폰이 진동했다 . 별생각 없이 화면을 켰다가 , 손이 그대로 굳었다 . [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 그리고 이름을 보는 순간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나는 엘리나를 힐끔 보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 [ 수잔나 - 경률 . 오랜만이네 . 잘 지냈어 ?] [ 나 - 어 ...... 오랜만이네 ] [ 수잔나 - 한국에 있을 때 , 네가 한국 떠났다는 얘기 들었어 . 지금 멜번이야 ?] 지난 1 년 동안 애써 덮어두었던 감정들이 , 마치 오래된 서랍을 억지로 열어젖힌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 잊었다고 생각했다 . 아니 , 잊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 나는 한참을 화면만 바라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 [ 경률 - 응 ] [ 수잔나 - 그렇구나 ] 별로 달갑지 않은 대화였지만 , 오래 전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시작했고 ,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했다 . 안부 정도는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경률 - 주혁이는 ? 잘 지내고 있어 ?]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수잔나 - 주혁이랑 끝났어 ] 짧은 문장이었지만 , 그 안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물었다 . [ 경률 : 아 ...... 그랬어 ?] 잠시 ‘ 입력 중 ’ 표시가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 수잔나 - 응 . 나도 지난 주에 호주로 돌아왔어 . 지금 부모님 집에서 지내 ] 그 순간 ,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 반가움도 , 분노도 아니었다 . 나는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망설이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 [ 경률 -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이번엔 답장이 조금 늦었다 . [ 수잔나 - 당신 잘 지내는지 궁금했어 . 멜번에 있으면 …… 한 번 보고 싶어 ]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이제는 그저 한때 부부였던 사이로서 , 단순히 안부가 궁금했을 뿐일까 . 아니면 나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그리움이 되살아난 것일까 . 모르겠다 . 다만 분명한 건 , 끝났다고 믿어왔던 이야기 어딘가에 아직 닫히지 않은 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 그 인식이 나를 자리에서 밀어냈다 .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 엘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 “ 어디 가 ?” “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 거짓말은 아니었다 . 하지만 전부도 아니었다 . 차에 올라타 수잔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멜번 시내에서 예전에 우리가 자주 갔던 그 카페에서 보자는 말이었다 . 시동을 걸면서도 왜 하필 그곳이어야 하는지 , 만나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 그저 몸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다 .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운전대에 손을 올리던 순간 , 메시지 알림음이 차 안을 울렸다 . [ 수잔나 - 응 , 알았어 . 나도 지금 나갈게 . 이따 봐 ♥ ] - 끝 -
이전글38화다음글 없음
회차 목록(39)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