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12화. 엇갈린 부부들 - 제 12화

겨울밤관찰자72026. 03. 29. 02:12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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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홍역을 치렀지만 수잔나와 섹스를 하고 나니 마음만큼은 모처럼 편했다 . 둘 사이를 갈라놓던 거리감도 많이 줄었고 . 그러나 그것이 내가 엘리나와 멀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 토요일이 되자 우리 둘은 다시 언어 교환 모임으로 나갔다 . 다른 사람들과는 형식적으로 인사만 주고받고 , 자연스레 엘리나와 주혁 앞에 앉았다 . 주혁은 친구들과 놀러 갔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 별로 시덥지 않은 내용이라 나는 이따금씩 성의 없는 대답을 하며 술만 홀짝 홀짝 들이켰다 . 그러다가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엘리나의 어학원 이야기로 넘어갔다 . “ 나 결국 그만두기로 했어 .” 엘리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 “ 오 , 정말 ? 그럼 언제까지 일해 ?” “ 다음 달 중순까지 . 에휴 ....... 더는 못해먹겠다고 하니까 원장도 좋았는지 아쉽다는 말 한 마디 안 하더라 .” 나는 숨을 눌러 삼켰다 . 이 타이밍에 그만둔다고 ?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 겉으로는 태연한 척 반응했다 . “ 그럼 이제 뭐 할 건데 ? 생각은 해 봤어 ?” “ 아직 모르겠어 . 그냥 좀 쉬면서 고민하려고 . 근데 , 어학원은 안 들어가고 싶어 .” 엘리나도 딱히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 한국에서 할 줄 아는 건 영어밖에 없는데 . 어학원을 떠나면 뭐 해먹고 살 거라는 말인가 ? 주혁이 벌어들이는 돈만으로 생활이 되나 ? 남들이 들으면 ‘ 아 , 그랬구나 . 조금만 더 고생해라 ’, ‘ 마무리 잘 해라 ’ 이런 식으로 대답하고 말았을 것을 .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뜻밖의 말을 꺼냈다 . “ 가르치는 게 싫으면 , 우리 회사 감수팀에서 일 해볼래 ? 번역물 체크하는 건데 , 원어민도 몇 명 있기는 해 .” 엘리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 “ 어 ? 그런 것도 있어 ? 그거 진짜 재밌을 것 같은데 ?” “ 응 . 지금 사람 더 뽑을 지는 모르겠는데 , 요즘 일감이 많아져서 한 번 얘기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 너 원하면 내가 팀장한테 이야기해볼게 .” 말은 가볍게 했지만 , 가슴 속은 뒤틀려 있었다 . 이걸 내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거지 ? 하지만 이미 말이 나간 이상 , 수습할 수도 없었다 . 엘리나는 내 마음도 모른 채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 “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 그럼 부탁 좀 할게 . 고마워 , 경률아 .” 수잔나는 옆에서 미소만 짓고 있었는데 , 그 표정이 왠지 모르게 차분했다 . 너무 차분해서 더 불안한 그런 느낌 . 그때 주혁이 갑자기 손뼉을 치듯 말했다 . “ 형님 , 그럼 엘리나 그만두면 , 잠깐 쉬는 겸해서 우리 네 명이서 캠핑 갈래요 ? 제가 이번에 회사에서 펜션 숙박권을 받았거든요 . 바비큐도 할 수 있대요 .” “ 오 , 괜찮네 !” 수잔나가 환하게 말했다 . 우리 넷이서 함께 하는 여행이라 ....... “ 좋지 ! 다 같이 가면 진짜 재밌겠네 .” 하지만 속은 삐걱거렸다 . 불륜녀의 남편 , 내 아내 , 그리고 우리 둘이 넷이 여행을 간다고 ? 그게 과연 재미있을까 ? 여행 내내 가시밭길이지 않겠어 ? 머릿속이 잠깐 멍해졌지만 , 겉으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 주혁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 오케이 ! 그럼 긴 말할 거 없이 바로 날 잡죠 . 엘리나 마지막 근무일이 금요일이니까 , 그 다음날 가는 건 어때요 ?” 우리 셋은 주혁의 말에 모두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 수잔나는 조용히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 “ 우리도 오랜만에 놀러간다 . 좋다 , 그치 ?” 나는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 “ 어 ? 흐흐 , 그러게 .......” 고기도 굽고 , 술도 마시고 , 사진도 찍고 ....... 겉으로는 네 사람이 아무 일 없이 웃고 떠드는 그림이 그려진다 . 그런데 그 속에 엘리나와 그의 남편이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 더 위험한 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문득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상상이었다 . 주혁과 수잔나의 눈을 피해 엘리나와 진득하게 빠구리를 하는 장면 . 말도 안 되는데 , 그 어두운 유혹이 자꾸만 머릿속을 비집고 올라왔다 . * * * “ 글쎄 , 일이 많은 건 맞는데 , 그렇다고 한 명 더 뽑을 정도인 지는 모르겠어 .” “ 아 , 그렇군요 .” 나와 감수팀장은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씩 하며 대화를 나눴다 . 엘리나 이야기를 했는데 , 결국은 자리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 “ 그래도 원어민 감수자를 구하기 힘든 건 사실이니까 . 일단은 운영부장님한테 한 번 이야기는 해 볼게 .” “ 감사합니다 .” 휴게실을 나온 나는 내 책상으로 돌아와서 메시지를 보냈다 . 별로 기대는 안 했는데 , 그래도 마음이 무겁다 . [ 나 - 저기 , 엘리나 . 이야기를 좀 해 봤는데 , 당장은 채용할 의사가 없는 것 같아 . 윗선에다가 물어본다고는 했으니 그래도 기다려 봐 ] 지금은 그녀도 일하고 있을 시간이니 못 볼 거라 생각하고 폰을 책상 위에 내려뒀다 . 업무를 이어 가려는데 , 곧바로 알림이 울렸다 . [ 엘리나 - 고마워 ] 나는 빙긋 웃으며 답장을 이어갔다 . [ 나 - 아니야 , 뭘 이런 거 가지고 . 저기 , 근데 .......] [ 엘리나 - 응 ?] [ 나 - 오지랖일 수는 있는데 , 조금 걱정 되어서 그래 . 너 거기 그만두면 정말 다른 어학원으로 안 갈 거야 ?] [ 엘리나 - 글쎄 , 잘 모르겠어 . 가르치는 게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 [나 - 음 ....... 주혁이 수입으로 충분하면 크게 걱정될 건 없긴 한데 ] 읽음 표시가 사라지고 , 한 동안 말이 없었다 . 가만히 대화창을 바라보고 있는데 , 말줄임표가 떴다 사라지길 반복하다가 메시지가 올라왔다 . [ 엘리나 - 오늘 저녁에 잠깐 볼 수 있어 ?] 갑자기 ? 난데없는 질문에 살짝 당황하면서도 설렜다 . 나는 벽시계를 한 번 올려다보고 답장을 이어갔다 . [ 나 - 볼 수는 있어 . 근데 7 시는 되어야 끝날 거 같은데 . 더 늦어질 수도 있고 ] [ 엘리나 - 아 , 그래 ? 그럼 어쩔 수 없지 ] 이제 보니 , 평소에 쾌활하던 말투가 전혀 아니었다 . 이상함을 느낀 나는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 [ 나 - 왜 그래 ? 무슨 일 있어 ?] [ 엘리나 - 보고 싶어 ] 얼마 전에 엘리나 집에 갔다가 , 수잔나와 한바탕 다퉜던 날이 떠올랐다 . 머릿속 이성은 가지 마라고 소리쳤지만 , 분명 안 좋은 일이 생긴 것만 같은 엘리나를 외면할 수 없었다 .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 그 다음은 수잔나에게 뭐라고 둘러댈 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 [ 나 - 내가 조금 일찍 끝내볼게 . 그렇게 되면 6 시까지 보자 ] [ 엘리나 - 고마워 ] [ 나 - 너 일하는 곳으로 데리러 갈게 . 주소 보내 줘 ] 엘리나는 자신이 일하는 곳의 주소를 보내주었다 .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분명한데 , 뭘까 ? 왠지 그녀가 일하는 어학원과 관련된 것 같았다 . 그 뒤로도 휴대전화는 조용해졌고 , 나는 다시 카톡을 켜서 메시지를 보냈다 . [ 나 - 여보 , 타지 사는 친구 한 명이 나 보러 왔대 . 일 끝나고 걔 만날 거라서 좀 늦을 거야 . 먼저 저녁 먹어 ]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도 잠시 . 더 이상 먹히기 힘든 회사 핑계를 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가 되었다 . 나는 퇴근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집중해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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