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13화. 엇갈린 부부들 - 제 13화

겨울밤관찰자72026. 03. 29. 03:12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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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빨리 해도 도저히 일찍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5 시가 조금 넘은 시각 . 나는 작업하던 걸 저장하고 , 사정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팀장에게 말했다 . 꼭 지금 가야 하냐며 핀잔을 줬고 , 나는 급한 집안일이라는 핑계를 둘러댔다 .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했고 , 곧장 회사를 나섰다 . 네비게이션은 55 분에 도착이라고 했지만 차가 많이 막히는 바람에 6 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 엘리나가 일하는 어학원 앞으로 가니 , 그녀가 입구 앞에서 휴대폰을 보며 기다리고 있다 . 도로가에 정차를 하고 경적을 울렸다 . 엘리나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고 ,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 “ 늦어서 미안해 . 차가 막혀서 .” “ 괜찮아 . 나도 막 나왔어 .” “ 춥지 ? 얼른 가자 .” “ 경률 .......” “ 응 ?” “ 고마워 .” 나는 빙긋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 등갈비가 먹고 싶다던 말에 , 강변 유원지에 있는 유명한 등갈비 식당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 맥주를 한 잔 하면서 간단히 목을 축이고 , 2 차로는 바에 가서 다시 한 잔을 했다 . 평일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고 ,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히 이야기를 나눴다 . “ 말해 봐 . 무슨 일 있었는 지 .” 엘리나 앞에는 조니워커 블랙 위스키 한 잔이 놓여 있다 . 독한 술을 음료도 타지 않고 온 더 락으로 벌써 세 잔째 들이키자 나도 걱정이 슬슬 앞섰다 . 엘리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 “ 나 , 오늘 원장이랑 또 한 판 했어 . 아니 , 그냥 ...... 일방적인 통보라고 하는 게 맞겠네 .” “ 통보 ?” “ 퇴사하겠다고 하니까 계약서에 적힌 대로 30 일 채우고 나가라더니 , 오늘 갑자기 말 바꾸더라고 . 다음 주 금요일까지만 일하래 . 대체 강사 이미 구했으니까 더 필요 없다고 .” 그녀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 내가 나간다니까 갑자기 다들 태도가 싸늘해졌어 . 한국인 동료들까지 . 나름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앞에 놓인 위스키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 “ 많이 속상하지 ?” 나의 물음에 엘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속상하고 , 허탈하고 그래 . 요즘은 말이야 , 다시 호주로 돌아가야 하나 싶어 .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이유도 모르겠고 .”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 “ 야 , 그건 아니지 .”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 소리가 컸던 지 엘리나가 움찔했다 . “ 그 어학원이 병신 같았던 거지 , 너는 아무 문제없어 . 너 잘못 하나도 없다고 .” “ 그런가 ......?” “ 그래 . 그리고 제대로 된 직장 들어가면 다를 거야 . 너 경력도 있고 ,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잖아 . 거기 원장이랑 그 동료들이 그냥 쓰레기였던 거야 .” 엘리나는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봤다 . 그 시선에 마음 한쪽이 저릿했다 . “ 그리고 ....... 내가 옆에 있잖아 .”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아주 미약하지만 ,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 “ 너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 진짜 .” 나는 엘리나의 손을 잡고 어루만졌지만 속에서는 한바탕 전쟁이 일어났다 . 이제 막 시작한 관계인데 벌써 끝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그녀가 없는 삶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 안심시키고 싶었고 ,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 “ 저기요 , 한 잔만 더 주세요 .” 엘리나는 조금 서툰 한국어로 한 잔을 더 주문했다 . 그 때 내 잔이 빈 걸 보고 한 잔 더 주문했고 ,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내 어깨를 툭 쳤다 . “ 걱정 마 . 이거만 먹고 갈 거야 .” 그녀는 웃으며 내게 기대왔다 . 나는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아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 절대 내 여자일 수가 없는 사람 . 그녀도 내가 절대 그녀의 것일 수 없었다 . 주혁이 그 놈이 얼마나 소홀하게 대했으면 엘리나가 나한테 이렇게 기댈까 싶었다 . 뭐 , 나야 고맙지만 . 막잔을 빠르게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주차장에 있는 차로 오는 내내 우리는 팔짱을 끼고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냈다 . 대리 기사를 부른 뒤 , 차 안에서 히터를 틀고 조용히 서로를 끌어안았다 . 오늘은 ....... 섹스를 하기 보다는 이렇게 온전하게 엘리나를 내 여자처럼 안고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 내 여자가 아닌 사람 . 욕심내고 싶다가도 그럴 수 없다는 현실에 항상 가로막혀 좌절하는 나날들 . 설렘 , 욕망 , 아쉬움 , 허전함이 공존하는 우리 관계 . 그래도 , 이렇게라도 내 삶 한 켠에 그녀가 머물러 있다는 게 , 참으로 고마웠다 . 손끝만 닿아도 심장이 뛰게 만드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다는 것 . 그걸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받고 있었다 . 내 삶에 언제 또 이런 날이 오겠나 ? 내일이 되면 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잠깐은 떨어져 있어야겠지만 , 지금 이 짧은 순간만큼은 그녀를 지켜줄 수 있다는 착각이라도 하고 싶었다 . 함께 체온을 나누던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 대리기사가 도착해서 엘리나를 집에 내려다주고 ,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 . 대리비 3 만 원을 건넨 나는 엘리나와 함께 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기분좋게 현관문을 연다 . “?” 집 안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다 . 뭐지 ? 수잔나가 아직 안 왔나 ? 거실 불을 켜고 , 방 안으로 들어간다 . 그러나 빈 침대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 휴대폰을 열었다 . 아까 회사에서 보낸 메시지도 아직 읽지 않았다 .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해서 전화를 걸어본다 . ‘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 ‘ 뚝 -’ “ 이 시간까지 뭐하는 거야 . 메시지도 안 보고 .” 연락이 안 되니 별 수 없었다 . 씻고 누우니 하루 종일 쌓았던 피로가 몸을 덮쳤고 , 눈이 스르르 감겼다 . 술기운까지 올라오며 거의 잠에 들락 말락 할 때쯤이었다 . 철컥 -. 현관문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나는 퍼뜩 눈을 떴다 . “ 여보 ?” 대답 대신 익숙한 힐 소리가 삐걱거리며 거실을 지나왔다 . 곧 방문이 열렸고 , 수잔나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나를 보며 실실 웃었다 . “ 나 왔어 , 히히히 .” 술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 평소 절대 취할 만큼 마시지도 , 이렇게 헤벌쭉 웃지도 않는 사람인데 , 무슨 일이지 ? “ 술 마셨어 ?” 내가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두 팔을 쭉 벌리고 다가왔다 . “ 응 . 기분 좋아서 한 잔 했지 .” “......”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앉더니 , 내 허벅지를 손끝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 “ 가까이 와봐 .” 평소엔 절대 하지 않을 애교였다 . 마치 연애 초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 나는 잠시 멍해졌다 . 엘리나와 함께 있다 온 뒤라 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 그런데도 수잔나의 들뜬 목소리와 붉어진 볼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 “ 아 , 좋다 . 역시 집이 최고야 .” 그녀가 내 옆으로 쓰러지듯 누우며 , 중얼거렸다 . “ 뭐하는 거야 . 신발 벗고 누워 .” “ 아 ? 헤헤 , 맞다 . 여기 호주 아니지 참 .” 수잔나는 거실로 나가서 신발을 벗고 다시 들어왔다 . 그 순간 , 갑작스러운 이 애정이 반가우면서도 두려웠다 . 마치 어디선가 균열이 난 줄 알았던 관계가 , 예고 없이 다시 내 쪽으로 달려와 안기는 느낌 .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 수잔나는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며 더 깊숙이 안겨왔다 . 알 수 없는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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