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1화. 엇갈린 부부들 - 제 1화

겨울밤관찰자72026. 03. 28. 15:12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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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주말이 되었다 . 오후 5 시 30 분 . 모임까지 1 시간 남은 상황에서 나는 거울 앞에서 옷 맵시를 다시 한 번 둘러보며 고치고 있다 . “ 뭘 그렇게 꾸며 ?” 수잔나가 가방을 챙기면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묻는다 . “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데 후줄근하게 나갈 수는 없잖아 . 다 됐다 . 가자 .” 나는 그녀를 데리고 차에 올라탔다 . 약속 장소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하고서 차를 출발한다 . 한산한 도로 위를 달려 ,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유리창 너머로 새어 나왔다 .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여러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 . 안을 둘러보는데 , 저 멀리 , 외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섞여 앉은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거기에는 이미 12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 한국인 여덟 , 외국인 넷 . 모두 삼삼오오 앉아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 안녕하세요 ?” “ 이경률씨죠 ? 반갑습니다 .” 30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 그룹 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우리를 가운데로 이끌었다 . “ 여러분 , 오늘 처음 참석하신 분들이에요 . 이경률씨 , 그리고 수잔나 .” 사람들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 몇몇은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반겨 주었지만 그 따뜻함은 피부 위를 맴돌기만 했다 . 익숙하지 않은 공간과 말투들 ,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어쩐지 몸이 굳으며 위축됐다 . 우리는 가장 끝자리에 조심스레 앉고서는 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 이미 형성된 그룹 특유의 공기가 있었다 . 서로를 잘 아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농담과 리듬이 빠르게 오갔고 , 우리는 그 흐름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구경꾼처럼 보였다 . 기본적인 자기소개 순서가 돌아왔지만 , 수잔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름만 말했고 , 나는 목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몇 마디를 더듬었다 . 사람들은 호응을 해주었지만 , 시간이 지날수록 어색함이 더 짙어졌다 . 맥주잔을 손에 쥐고 있자 마실 타이밍도 놓쳤다 . 옆자리 한국인 두 명이 외국인 한 명과 흥미로운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 끼어들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 . 수잔나 역시 두 손가락으로 맥주잔을 굴리며 주변을 힐끗거리기만 할 뿐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렇게 모임의 첫 20 분이 흐르는 동안 , 우리는 마치 얼음 속에 갇힌 사람들처럼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조심스레 눈치만 보고 있었다 .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에 나는 술만 홀짝 홀짝 들이켰고 , 수잔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딱히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그때였다 . 대각선 건너편 , 조명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자리에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 금발 머리를 어깨까지 자연스럽게 늘어뜨렸고 , 체구는 조금 통통했지만 편안하고 따뜻한 인상이 느껴졌다 . 무엇보다 짙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 나도 모르게 그녀를 빤히 보고 있는데 , 내 시선을 느낀 건지 , 그녀도 마침 고개를 들었다 . 눈이 마주치는 순간 , 우리 둘은 가볍게 빙긋 웃었다 . 나는 무심코 다시 한 번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 그러자 그녀는 조금 더 확실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 순간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그냥 , 오래된 방 안에서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 그녀는 옆에 앉은 한국인 두 남자와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으이그 , 속 보이는 새끼들 . 말이 언어 교환이고 사교 모임이지 , 어떻게든 외국인 여자 만나서 한 번 해 보려고 나온 게 뻔히 보였다 . 그들의 웃음이 크게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 정작 그녀는 그저 매너 있게 반응하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 대화의 중심이 아니라 , 예의상 앉아 있는 느낌 ? 어떤 사람이길래 첫 인상에 나를 사로 잡았을까 ? 술도 한 잔 해서 용기도 생겼겠다 , 나는 그녀와 대화를 좀 하고 싶었다 . 문득 , 옆을 보니 수잔나는 언제부터인가 옆 자리 외국인과 떠드느라 바쁘다 . 나는 눈치를 보다가 살짝 몸을 일으켰다 . 수잔나는 내게 눈길을 한 번 주고서는 옆 사람과 대화를 이어갔다 . 그 틈을 타 , 난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옆을 돌아 엘리나 쪽 빈자리 하나에 다가갔다 . “ 여기 ....... 앉아도 괜찮을까요 ?” 내가 말하자 엘리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반가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 “ 그럼요 .”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잡았다 . 옆에 있던 두 남자도 잠깐 경률을 보고는 자리 분위기에 맞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 호주 살면서 외국인들을 그렇게 많이 만나 봤건만 , 막상 이 상황이 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그녀였다 . “ 오늘 처음 오셨죠 ?” “ 아 , 네 .” 말이 부드럽게 이어지자 엘리나는 좀 더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 “ 반가워요 . 엘리나라고 해요 .” “ 네 , 헤헤 .” 그녀는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 나는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 “ 어디서 왔어요 ?” 외국인을 만나면 늘 레퍼토리처럼 묻는 질문이다 . “ 아 , 저는 호주에서 왔어요 .” 그녀의 말에 나의 눈이 번뜩 떠졌다 . “ 정말요 ? 저희도 호주에서 왔어요 . 저기 , 제 와이프도 호주 사람이에요 !” “ 어머 , 정말요 ? 호주 어디요 ?” “ 멜번이요 .” “ 저도 멜번에서 왔어요 .” 엘리나의 눈이 더욱 커졌다 . 이럴 수가 , 한국에서 호주 사람을 만나기도 힘든 와중에 같은 지역에서 온 사람을 만나다니 . 그 동안 , 머릿속에 가득하던 어색함이 눈 녹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 “ 저는 크랜번에서 살았어요 .” 그 말이 나오자 엘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 “ 저는 셰퍼튼에서 살았어요 . 완전 반대네요 !” “ 에이 , 호주가 땅이 얼마나 큰데 , 그 정도면 이웃이죠 .” “ 그런가요 ? 하하 .”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 그 웃음 소리에 수잔나가 우리 둘을 바라 보았고 , 나는 그녀에게 곁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 둘을 소개시켜 주고 나니 둘은 금방 대화의 물꼬를 텄고 , 우리 셋을 둘러 싼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 올랐다 . 엘리나의 옆에 있던 한국 남자 두 명은 대화에서 소외되더니 자기들끼리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버린다 .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어요 ?” “ 아 , 저희 남편이 한국 사람이에요 . 결혼하고 한국에 살게 되었어요 .” 솔직히 말하면 , 그때부터는 모든 게 조금 흐릿했다 . 정확한 문장 , 누가 먼저 웃었는지 , 누가 먼저 질문을 던졌는지 그런 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 다만 , 한 가지 . 엘리나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는 사실만은 또렷했다 . 몇 년 만에 누군가와 이렇게 티키타카가 잘 되었던가 . 말만 던지면 바로 받아주고 , 내가 농담을 하면 눈이 먼저 웃고 , 그 다음 입이 따라 웃는 사람 .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웠고 , 리액션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따뜻했다 . 나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 금발에 푸른 눈이라는 전형적인 이미지 때문도 아니었다 . 첫인상 때문이었다 . 마치 , 오랫동안 속에서나 만났으면 했을 법한 사람이 현실에 나타난 것 같은 기시감 같은 것이었다 . 모임이 끝나갈 무렵 , 사람들은 하나둘 결제를 하고 옷을 챙겼다 . 수잔나는 이미 피곤해 보였고 , 나는 분위기를 정리하면서도 자꾸 엘리나 쪽을 신경 쓰고 있었다 . 그녀 역시 가방을 메며 나를 흘끔 바라보며 미소를 흘렸다 . 그런 그녀가 다음에도 이 모임에 나올까 ?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나는 재빠르게 다가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 “ 혹시 카톡 쓰세요 ?” 초면에 너무 직설적으로 물은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 “ 당연하죠 . 한국에서 카톡 안 쓰면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못하잖아요 .” 그녀가 피식 웃으며 아이디를 알려 주었다 . 우리는 휴대폰을 꺼냈고 , 자연스럽게 서로의 아이디를 스캔해 등록했다 . 옆에 있던 수잔나도 그녀와 카톡 아이디를 교환한다 . 그 짧은 순간 , 스크린 불빛 너머로 서로의 얼굴이 비쳤다 . 엘리나의 미소는 남겨두고 싶은 장면처럼 내 가슴 어딘가에 박혀 버렸다 . 밖으로 나와 수잔나와 함께 차에 올랐지만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수잔나는 오늘 어땠냐고 묻거나 , 다음엔 더 일찍 가보자고 말했지만 , 나는 성의 없는 대답만 할 뿐 , 머릿속은 계속 엘리나의 웃는 얼굴로 가득했다 .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 , 카톡 알림이 하나 떴다 . [ 엘리나 - 잘 들어가셨어요 ? 오늘 재미있었어요 !] 짧은 문장이었지만 내 가슴이 한 번 크게 뛰었다 . [ 나 - 네 , 저희도 잘 들어갔어요 . 만나서 반가웠어요 ] [ 엘리나 - 자주 나오셨으면 좋겠네요 , 헤헤 ] [ 나 - 토요일마다 나갈게요 . 주말에 봐요 ] [ 엘리나 - 그러죠 .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봐요 ^^] 마지막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끝으로 휴대폰을 닫았다 . 하지만 ,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 참으로 묘한 감정 . 결혼한 여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 나 역시 유부남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엘리나의 첫인상과 그 따뜻한 눈빛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 눈을 감으려 하면 오히려 선명해졌고 , 억지로 지우려 하면 더 짙게 떠올랐다 . 그날 밤 , 나는 참 오랜만에 누군가의 첫인상을 잊지 못한 채 뒤척이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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