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23화. 엇갈린 부부들 - 제 25화

겨울밤관찰자72026. 03. 29. 13:12 20
18px
엘리나는 면접을 잘 봤다면서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 감수팀이 그녀에게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할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네 . 월요일 아침 ,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나가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 엘리나와 한 회사에서 함께 일한다니 설레기도 하고 앞으로 있을 일에 조금은 긴장도 된다 . 전체 주간 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실에 들어가자 이미 번역 1·2·3 팀 , 감수팀 , 운영지원팀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 나는 조용히 뒤쪽 자리에 앉았고 , 회의가 시작되었다 . 운영팀장이 마이크를 넘기고 , 감수팀장이 그걸 받아서 공지를 시작했다 . “ 자 , 오늘은 회의 시작하기 전에 좋은 소식 하나 전하겠습니다 . 감수팀에 새로운 멤버가 합류했어요 .” 감수팀장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 엘리나씨입니다 . 번역 2 팀의 이경률씨 친구이기도 하고요 . 이번에 팀 인력 공백이 갑자기 생겼는데 경률씨가 큰 도움을 줬습니다 .” 그 말에 회의실 뒤쪽에서 여러 시선이 내 쪽으로 몰렸다 . 나는 순간 당황해서 고개만 아래로 푹 숙였다 . “ 경률씨 , 정말 수고 많았어요 .” “ 좋은 일 하셨네요 .” “ 잘 모시겠습니다 , 엘리나씨 .”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 엘리나는 일어나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 “ 잘 부탁드립니다 .” 나는 괜히 볼이 뜨거워져서 자리만 만지작거렸다 . 마치 내가 일으킨 파동이 눈앞에서 현실이 된 것처럼 , 어색한 동시에 묘한 책임감 같은 게 밀려왔다 . 그 날 저녁 , 끝나고 나가려는데 엘리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 [ 엘리나 - 잠깐 , 시간 돼 ? 나 진짜 고마워서 그래 . 밥이나 술 한 잔 사도될까 ?]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 아니 , 거절할 게 아니었다 . 우리는 회사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에 자리를 잡았다 . 닭꼬치와 맥주 한 병씩을 시키면서 엘리나의 첫 출근을 축하했다 . 초반엔 가벼운 회사 이야기 , 첫 출근 소감 같은 걸 나눴다 . 그러다가 그녀는 잔을 천천히 내려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 “ 솔직히 , 요 근래에 너무 힘들었어 . 어학원 그만두고 수입이 확 줄었고 , 생활하기도 빠듯했거든 . 그래서 주혁이랑도 자주 다퉜고 .”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고 나서 , 유리잔 테두리를 손끝으로 빙글 돌렸다 . “ 근데 , 너 때문에 살았어 .” 그 말이 심장을 탁 치고 들어왔다 . 그녀는 말을 이었다 . “ 정말 , 고마워 .” “ 헤헤 , 뭘 이 정도 갖고 .” 그 후 , 아무 말도 않은 채 , 그녀가 계속 말을 잇도록 기다렸다 . “ 그거 알아 ?” “ 뭐 ?” “ 사실 ....... 나 한국에 오고 나서 여러 번 위기가 왔었거든 . 근데 있잖아 ...... 너가 나를 몇 번이나 구해줬었어 .” 나는 웃으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 “ 내가 뭘 했다고 그래 , 하하 .” “ 진짜야 .” 엘리나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눈빛은 단단히 서 있었다 . “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 ...... 이렇게 내가 타지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흔들릴 때 , 나를 잡아준 건 너였는데 ....... 너 같은 사람이 내 남편이었으면 어땠을까 .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어 .” 나는 도저히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 천천히 술을 마시면서 그녀를 외면했다 . 그 말에 기뻐해야 할 지 , 불편해야 할 지 , 위험하니까 선을 그어야 할 지 .......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뒤섞였다 . ‘ 성욕만 풀고 , 마음은 주지 말자 .’ 수잔나와 한 약속이 문장 그대로 뇌리에 박혔다 . 그런데 이미 나는 그 선을 지킬 자신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 엘리나의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었고 , 그 안에는 감정이 너무나도 많았다 . 그리고 그걸 보면서도 , 나 역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술잔을 내려놓으며 나는 애써 웃었다 . “ 일단 , 오늘은 축하하는 날이니까 기분 좋게 마시고 , 복잡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이미 울렸던 경고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 오히려 더 커지고 있었다 . 오늘 왠지 엘리나랑 술 한 잔 할 것 같아서 차를 안 끌고 왔는데 , 그렇기 하길 참으로 잘했다 . 우리 둘은 다정하게 손을 마주 잡고서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 그 때 엘리나가 그런 말을 했다 . “ 경률아 .” “ 응 ?” “ 만약에 말이야 .......”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길바닥을 보며 한참 뜸을 들였다 . “ 뭔데 그래 . 얼른 말해 봐 .” “ 후 .......” “?” “ 만약에 말이야 , 내가 주혁이랑 이혼하면 ....... 너는 기분이 어떨 것 같아 ?” “ 뭐 ?”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도 뜬금없어서 ,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 “ 이혼 ?” 내가 되묻자 , 엘리나는 애써 웃어보였지만 그 표정은 금방 무너졌다 . “ 그냥 , 요즘 너무 답답해서 . 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았어 .” 엘리나는 할 말이 참으로 많아 보였다 . 나는 휴대폰 시계를 한 번 보고는 역사로 내려가지 않고 , 입구 앞에 있는 벤치 앞에 그녀와 함께 앉았다 . 그녀는 내 손을 맞잡고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 “ 주혁이랑 예전 같지 않아 . 정선 여행 다녀온 이후로는 더 그래 . 그냥 남처럼 지내 .” “ 왜 ? 무슨 일 있었어 ?”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 모르는 척 물었다 . “ 그날 이후로 잠자리도 한 번도 안 했거든 . 내가 먼저 손을 잡아도 피하고 , 옆에 누워도 몸을 틀고 . 정 떨어진 사람처럼 굴더라고 .” 엘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 “ 내가 뭐 잘못한 건가 싶어서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 그냥 피곤하다 ,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 , 그런 말만 해 .”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 사실 알고 있었다 . 그 날도 그랬고 , 며칠 전에 쓰리섬 할 때 주혁은 수잔나와 관계를 가졌다 . 마음만은 주지 말자고 다짐했던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은 마음을 흘러가는 일에 그대로 맡겨 버리고 말았던 것일까 ? 그게 사실이라면 ....... 주혁이 그 놈에게 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이겠지 . 수잔나와 달리 , 주혁은 완전히 뒤틀려 버린 것이다 . 자기가 건드린 여자와 자기 아내를 자연스럽게 비교했을 테고 , 그건 주혁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을 테니 . “ 경률아 .” 엘리나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요즘 진짜 미치겠어 . 주혁이가 나를 더 이상 여자로 보지 않는다면 ..... 난 어떻게 해야 할까 ?”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 나는 그녀를 내 품으로 끌어안았다 . “ 울지 마 .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 그 말이 너무 뻔하다는 걸 알았지만 , 지금 그녀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 엘리나는 내 품을 기다렸다는 듯 , 아무런 거리낌없이 파고 들어왔다 . 복잡한 감정이 이내 가슴에 물든다 .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 주혁이란 놈에 대한 비웃음 , 그리고 ....... 수잔나와 했던 약속까지 . 욕정만 공유하고 마음은 주지 않기로 했던 그 약속 . 그러나 나는 이미 그 선을 넘어 와 있었다 . 엘리나는 잠시 내 어깨에 기대더니 , 낮게 말했다 . “ 어떡해 ? 너랑 있으면 , 정말 마음이 편해져 .” 나는 그 말이 너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 떼어낼 수 없었다 . 그리고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 그녀에게 기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 시간은 흘러갔고 , 우리는 몇 번의 전철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 막차 시간이 다 되어갈 때 , 정신이 번쩍 들었고 ,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
회차 목록(39)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