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36화. 엇갈린 부부들 - 제 38화

겨울밤관찰자72026. 03. 30. 02: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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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 단톡방에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 아주 짧고 건조하게 . [ 나 - 할 말 있어 . 전부 7 시까지 당촌역 앞 카페로 와 ] 보내고 나서도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 ‘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 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 아니 ,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 이 만남이 끝이라는 걸 . 퇴근 후 , 엘리나를 차에 태우고서 약속한 곳으로 갔다 .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유난히 차갑다 . 주혁과 수잔나는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 서로를 마주 보는 게 아니라 나란히 앉아 있었다 . 가까이 앉은 둘의 모습이 어젯밤의 분노를 다시 일으켰다 .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 공기가 달라졌다 . 한번 얼어붙으면 절대 다시 녹지 않을 것 같은 냉기였다 . 인사도 없이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 컵에 담긴 물조차 마시지 않았고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 한 가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모이라고 했어 .” 나는 주혁을 바라봤다 .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 너 ....... 정말 수잔나 사랑하냐 ?” “ 네 .” 단호한 대답 . 숨을 들이쉴 틈조차 주지 않는다 . 이번엔 수잔나다 . “ 너도 ....... 주혁이 사랑해 ?”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 “ 응 .” 그 한 음절로 , 머릿속이 깜깜해지고 가슴이 무너졌다 .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표현이 이런 거구나 . 내가 버텨온 시간들 , 수잔나와의 관계를 유지하게 위해 발버둥 쳤던 노력들에게 참 잔인한 사망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 절망감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고 , 짙은 남색 타일 바닥만 보였다 . 그때 , 옆에서 엘리나의 손이 내 손을 덮었다 . 따뜻한 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쥐자 , 추락하는 것만 같던 나 자신이 구원 받는 느낌이 들었다 . 그게 아니었으면 ....... 아마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 수잔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목소리는 떨렸지만 결은 분명했다 . “ 이제 당신한테 더 이상 거짓말하면서 연극하고 싶지 않아 . 주혁이랑 새로 시작하고 싶어 .”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나가 벌떡 일어났다 . “ 미친년 아니야 ?” 카페 안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 나는 급히 엘리나의 손목을 잡았다 . “ 그만해 .” 그녀의 숨소리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점점 거칠어졌다 . “ 경률아 , 얘 지금 뭐라는지 못 들었어 ?” “ 됐어 . 그렇게 하라고 해 .”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 너무 차분해서 , 오히려 더 끝나버린 느낌이 들었다 . “ 길게 얘기해봐야 소용 없겠네 . 우리 넷 다 모두 확실하잖아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수잔나를 봤다 . 마지막으로 , 정말 마지막으로 . “ 오늘 와서 당신 짐 다 챙겨서 나가 .” 엘리나의 손을 잡고 함께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 갑자기 그녀가 몸을 홱 돌리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물컵을 집어 들더니 , 그대로 주혁의 얼굴에 끼얹었다 . “ 개새끼야 !” 물방울이 주혁의 얼굴과 셔츠를 타고 흘러내렸다 . 사람들의 탄성이 터졌다 . 엘리나는 멈추지 않았고 , 그의 뺨을 있는 힘껏 갈겼다 . “ 네가 인간이냐 ? 진짜 ?” 그리고는 수잔나에게 달려들었다 . 머리채를 움켜쥐며 소리치자 수잔나도 엘리나의 머리를 잡으면서 영어로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 여자 둘이 엉켜 넘어졌고 , 카페 직원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뜯어말렸다 . 의자들이 밀리고 , 테이블 위의 물컵이 엎어져 물이 쏟아져 내린다 . 주혁은 두 여자를 적극적으로 뜯어 말리지만 나는 멀찌감치 지켜만 볼 뿐 ,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뭐랄까 ,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인데도 , 전혀 현실 같지 않았다 . 사람들이 끼어들어서 말린 덕분에 엘리나와 수잔나는 겨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 엘리나는 수잔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고 , 수잔나는 머리가 산발이 된 채 , 독기서린 눈으로 엘리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그제야 , 굳어 있던 내 몸이 풀렸고 , 나는 엘리나의 팔짱을 끼고서 카페를 나왔다 . 우리 둘은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 엘리나는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어 보였다 . 눈만 붉힌 채 가방을 닫았다 . 택시를 타고 내 집으로 가니 , 문은 열려 있었고 , 안에서는 수잔나와 주혁이 이미 와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 거실 한가운데에 캐리어 두 개가 열려 있었고 , 옷가지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 그들은 우리를 보자 잠깐 멈췄다가 , 다시 짐을 챙겼다 . 그러면서 그 어떠한 말도 없었다 . 지퍼 닫히는 소리가 나고 두 사람은 우리 곁을 지나서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엘리나와 나는 거실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내 머릿속은 아직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 매몰차게 떠나갔던 주혁과 수잔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 서프라이즈 !’ 라고 하면서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까하는 되도 않은 생각까지 해 본다 . 단톡방에 메시지가 하나 뜬다 . 주혁이 보낸 것이었다 . 우리 둘은 동시에 폰을 열어 읽었다 . [ 주혁 - @ 엘리나 당신 남은 짐 현관 밖에 다 내놨으니까 와서 가져 가 ] 그 뒤로 ‘ 심주혁님이 채팅방을 나갔습니다 ’, ‘ 수잔나님이 채팅방을 나갔습니다 ’ 라는 알림이 차례로 뜨며 그 곳에는 엘리나와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데 , 엘리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 “ 두 연놈들 쌍판때기 보기 싫었는데 , 잘 됐네 .” 엘리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 눈빛은 단단했고 , 행동에는 결기가 서려 있었다 . 나는 그녀를 데리고서 주혁의 집으로 갔고 , 그 현관 앞에는 그녀가 미처 챙기지 못한 짐들이 놓여 있었다 . 엘리나와 나는 그것을 하나씩 주워서 트렁크에 실었다 . 수잔나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 있나 싶다가도 ,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 분노도 슬픔도 늦게 도착하는 타입처럼 , 현실 인지를 못하고 있었고 , 생각들은 내 안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엉켜 있었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이사이로 다른 감정이 스며들었다 . 앞으로 엘리나와 함께할 시간에 대한 기대였다 .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고 ,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빌리지 않아도 되는 관계 . 당당하게 그녀를 안고 ,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 .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숨이 조금 트였다 . 수잔나의 물건들로 채워졌던 서랍장 , 옷장은 엘리나의 것으로 하나둘씩 채워졌다 . 그럼에도 수잔나와 내가 함께한 세월들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 함께 쓰던 머그컵 , 우리 두 사람의 칫솔이 나란히 걸려 있던 칫솔걸이 , 욕실 용품 , 같이 장 봐왔던 식자재들 . 그리고 ....... 거실 벽 한쪽에 아직까지 걸려 있는 결혼사진 .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두 남녀 . 쟤들은 쟤들의 결혼 생활이 이렇게 끝날 거라는 걸 알았을까 ? 그 사진 앞에 멈춰서 멍하니 있는데 , 엘리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기라도 했을까 ? 그녀는 나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 “ 사실 난 이런 순간을 ....... 오래 기다렸어 .” 그녀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 이 집에 남은 흔적들 , 하나씩 우리 행복으로 바꿔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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