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15화. 엇갈린 부부들 - 제 15화

겨울밤관찰자72026. 03. 29. 05:12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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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 화면에 무수히 뜬 글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다 . 은근히 나를 돌려 까던 대화 , 그리고 두 사람이 손을 잡았음을 암시하는 말들까지 . 잊으려 하면 떠올라서 나를 괴롭힌다 .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 출발은 내가 먼저 했고 , 우리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나 때문이라는 것도 . 그런데 , 가슴은 그게 아니었다 . 아무리 이성이 “ 네가 먼저 망가뜨린 관계다 ” 라고 속삭여도 , 감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으니까 . 며칠 동안 수잔나에게 미안해서 더 잘해보려고 , 마음을 다잡고 정성과 애정을 쏟아보려고 했던 그 시간과 노력이 한 순간에 부정당한 기분 . 내가 만든 균열임을 알면서도 ,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기댔다고 생각하니 억울함 , 질투 , 분노가 몇 겹으로 밀려왔다 . “ 경률씨 .” “ 네 , 네 ?” 나는 화들짝 놀라서 옆을 돌아봤다 . 팀장님이었다 . “ 미안한데 , 그거 잠깐 중단하고 , 능성테크에서 보내 온 수출 계약서 먼저 좀 번역해줘야겠어 . 파일은 내가 메일로 보냈거든 .” “ 아 ....... 그래요 ?” “ 응 . 원래 그쪽이랑 합의한 납기는 내일 모레까지인데 , 사정이 생겼나 봐 . 내일 오후 4 시까지 받고 싶대 .” “ 네 , 알겠어요 .” “ 그리고 이건 그 업체에서 보내 온 자료야 . 계약서상의 제품이 대형 장비다 보니까 사양서 번역할 때는 여기 적힌 전문 용어를 써서 해야 된대 . 참고해서 작업해 .” 나는 서류를 받아들고 옆에 내려두었다 . 긴급한 업무를 받았지만 도저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 분초를 다투는 순간임에도 나는 화장실에 잠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서 사무실을 나왔다 . [Elina] 통화 목록을 찾아 눌렀다 . 서너 번 정도 신호가 가다가 신호음이 끊기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경률 !” 엘리나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고 , 기대고 싶었고 , 보고 싶었다 . “ 출근 준비 잘 하고 있어 ?” “ 응 . 아침 먹고 조금 이따가 나가려던 참이었어 .” “ 그랬구나 .” “ 목소리가 왜 그래 ? 어디 아파 ?” 네 남편 , 내 마누라랑 단둘이 술 먹고 손도 잡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들어갔다 . 말해본들 뭐하겠는가 ? 엘리나랑 나는 더한 짓도 했는데 . “ 저녁에 ....... 잠깐 볼래 ?” “ 아 ....... 미안해 . 오늘 저녁에는 나 약속 있어 .” “ 그래 , 알았어 . 출근 잘 하고 .” 엘리나의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 잠시 후 , 그녀가 보냈을 걸로 추정되는 카톡이 하나 떴지만 , 읽지도 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 사무실로 돌아와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 수잔나 ....... 네가 주혁이랑 그렇게 놀아난다 이거지 ? 좋다 . 우리 결혼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 이제야 알 것 같네 . 마음 한쪽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 그럼에도 나는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 우리 둘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 지 , 삶이 어떤 걸로 채워질 지 , 그 모든 것들을 똑똑히 보고 느끼고 싶었다 . 그래야 마지막 순간에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 과연 누구를 붙잡으려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 무엇보다도 ....... 내게도 명분이 생겼다 . 엘리나와의 밀애를 이어갈 수 있는 명분 . 혹 , 나중에 수잔나한테 들켰을 때 , 적어도 내가 주눅들 필요는 없어졌으니 . 물론 , 그렇다고 해서 가슴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 미친 듯이 아렸다 . 그런데 그 아픔마저도 이제는 내 몫이라고 , 내가 만든 길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책상에 앉고서는 다시 일에 매진했다 . * * * 집으로 오는 길 . 조수석에는 레드 와인 한 병과 한우 소고기 한 세트가 올라가 있다 . 오늘 맛있는 거 좀 먹이고 이야기 좀 나눌까 한다 .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길 기다리며 , 앞차를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다 . 적어도 나는 수잔나와의 관계를 지키면서 엘리나와 그 지랄을 하는데 , 수잔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저러고 있을까 ?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 우리 관계를 어떻게든 지켜보겠다는 의지가 있어서 주혁에게 기댄 건지 , 아니면 그냥 마음이 식어서 자연스레 다른 길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만약 그녀도 나처럼 그래도 우리의 결혼 생활을 계속 지키자는 마음이라면 , 나는 어떻게든 이 결혼을 지켜낼 것이다 .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지만 다시 이어붙일 여지는 있으니 . 그러나 , 그녀가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라면 ...... 그땐 내가 본 모든 걸 그녀 눈앞에 그대로 펼쳐 보일 생각이었다 . 덮고 넘어갈 일도 , 철저히 모른 척할 일도 아니니 . 그리고 나도 결정을 내려야겠지 . 갈라설 지 말 지를 . 그 생각을 하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 수잔나가 막 저녁 준비를 하다가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 “ 자기 왔어 ?” “ 응 . 짜잔 !” 나는 손에 든 와인과 소고기를 들어 보였다 . “ 어머 , 오늘도 한 잔 하는 거야 ?” “ 응 . 자기 한우 좋아하잖아 . 갑자기 생각나더라 .” “ 파스타 하려고 했는데 , 하지 말아야겠다 , 헤헤 .” 나는 수잔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 그녀는 내 등을 끌어안고 키스를 받아주었다 . 내가 본 게 있고 , 알아버린 게 있어서 그런 그녀의 모습조차 가식처럼 느껴졌지만 침착하게 숨기기로 한다 . 씻고 와서 식탁에 둘이 마주 앉았다 . 전기 그릴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 우리는 와인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 맛있게 먹는 그녀를 보면서 말을 꺼냈다 . “ 자기야 .” “ 응 ?” 수잔나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며 나를 바라봤다 . 얼굴에 묘하게 밝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우리 호주 살 때 했던 말 기억나 ? 한국 가서 같이 살아보자고 한 거 .” “ 응응 . 당연히 기억나지 .” “ 한국 오고 나서 계속 생각해봤어 . 자기 입장에서는 큰 결정하고 나 따라왔을 텐데 , 어렵게 이민 와서 적응하느라 힘들게 사는 지도 모르고 . 내가 너무 못해준 거 같아 미안해 .” 내가 말을 끝내자 수잔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 “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 “ 아니 , 그냥 , 그런 생각이 요 근래에 많이 드네 . 우리가 너무 바쁘기도 했지만 , 내가 당신한테 신경을 많이 못 쓴 것 같아 .” 말을 아끼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 혹시 죄책감 비슷한 흔적이라도 보일까 했지만 , 수잔나는 오히려 부드럽게 웃었다 . “ 자기가 뭘 못해줘 . 나 잘 살고 있어 .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 나 당신 아니었으면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지도 못했어 .” 되게 틀에 박힌 대답이지만 ,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 ‘ 고맙다 ’ 라는 말 치고는 너무 가볍게 들렸기 때문이다 . 부담을 덜어내려고 하는 듯 , 책임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톤 . 나는 겉으로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 “ 그럼 , 요즘은 힘든 건 없어 ? 아니면 나한테 바라는 거라든지 .” “ 응 ?” 수잔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 시선을 피했다 . “ 괜찮아 . 그냥 어학원 일이 좀 스트레스라서 그렇지 . 그리고 내가 자기한테 바랄 게 뭐가 있어 . 같이 이렇게 밥 먹고 내 곁에 있어주고 그러면 되지 .” 그렇게 말하면서 와인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 나는 미동도 않고 한 번 더 물었다 . “ 정말 나한테 바라는 거 없어 ? 아니면 나한테 서운한 거라든지 ?” “ 없어 .” “ 그래 . 그냥 물어봤어 .” 나는 고기를 뒤집으며 태연한 척 말했고 , 수잔나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 “ 자기 왜 그래 갑자기 . 최근에 우리 분위기 좋잖아 . 별생각 말고 , 그냥 맛있게 먹자 .” 그녀가 내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 따뜻하게 온기가 전해졌지만 ....... 그 따뜻함이 어쩌면 나만을 향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여 왔다 .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너무 평온한 얼굴이 , 오히려 더 낯설었다 . “ 그래 . 맛있게 먹자 .”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 하지만 , 속마음은 여전히 의문과 의심으로 가득했다 . 우리가가 하는 이 대화가 , 이 부드러운 분위기가 , 과연 진짜 우리 둘만의 것인지 . 아니면 , 이제 막 시작된 어떤 ‘ 연극 ’ 의 일부분인 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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