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Eternal 3, 4화
빗속의고양이22026. 04. 25. 12:0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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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의 용량이 500자를 넘지 않아, 부득이하게 4화를 함께 올립니다.
졸문의 긴장감과 전개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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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
아내는 언제부터인가 내 곁에 있었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의 곁에서 나와 시간을 보내며 내 인생의 한 조각이 되었다.
그렇게 만남이 계속되던 어느 날 문득 내 눈에 비친 아내는 참 아름답고 귀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느낌이 만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똑같았다. 하지만 매번 만날 때마다 그녀는 달랐다.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지금 떠오른 기억엔 그러했다.
그때는 아내만이 뿜어내는 독특한 매력이라 여겨졌기에 그저 신비로웠다. 아니 그랬었나 보다. 지금은 나에게 확실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으니.
항상 같은 머리를 하고 비슷한 분위기의 옷을 입고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현재의 내 기억 속에선.
혼란스러운 젊은 날, 아내는 나의 이정표였다. 나의 갈 길을 매번 보여주는 광야 한복판의 나만을 위한 이정표. 매번 새로움이 더해지는 동일한 이정표라는 표현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이 새벽 갑자기 떠오른 그날의 아내는 그러했다.
나에게 아내는 항상 새로운 존재였기에 그녀를 보는 하루하루가 신선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나에게 항상 똑같은 사람이라고 그 점이 믿음직하지만 지루한 사람이라 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점도 기이했다. 아내가 새로울 때마다 나도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항상 같았다. 당신은 안 변해요. 그때 알았어야 했다. 왜 변화는 늘 아내의 몫이었을까? 나도 분명 변해갔는데. 하지만 아내는 항상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한결같아요. 이제서야 그 말이 이상했음을 감지했다. 항상 변함없는 내 사랑을 말하는 줄 알았다. 지금은 아니다. 그 뜻이 아니었음을 안다.
시간의 흐름은 변화를 만든다. 사람은 물론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한때는 '내 사랑은 영원할 거야' 말하던 내가 있었다. 그녀는 웃었다 항상. 나의 맹세를 들으며. 언젠가는 그 부드러운 웃음 뒤에 슬픔이 보이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아내는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내와 나는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 아내도 그럴까? 내 생에 유일하게 아내만이 나는 불변이라 했다. 무엇이?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바로 어제까지 아내는 말했다. '당신은 그전부터 변함없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에서야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전부터? 앞으로도?'
우리의 20년은 무엇이었을까?
내 기억의 삶은 처음 만난 이후부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서로를 챙기고 반복되는 아침을 보내며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 더욱 애틋해졌다.
오죽하면 우리를 가장 오래 보아온 교회 사람들도 두 사람은 지금이 신혼처럼 보인다고 했을까?
하지만 지금 기억의 편린 속에 헤매는 나는 그들의 말이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는다. 지난 주말 아내와 벚꽃길을 걸을 때는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 나를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내 옆의 동반자였던 아내마저도 다른 존재로 느껴질 만큼.
아내의 말을 되뇌며 생각해 본다. 우리는 만남은 언제였을까? 이제 당연했던 기억마저 흐릿해진다. 아니, 의심스럽다. 아내는 항상 사랑스러웠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침대에 누워 잠을 잘 때도. 그런데 지금은? 안방 침대에 가득한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깊이 잠든 아내를 떠올려본다. 내 의식 속에 떠오른 아내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거실 너머 안방에는 아내가 잠들어 있다. 지금 가보고 싶다. 가서 아내를 보고 싶다. 꼭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당장에 일어나야만 했다. 머리는 그렇게 나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차가워졌다. 난 아내를 사랑하는데? 그녀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내 몸은 꿈쩍하지 않는 거지? 머리가 아팠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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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집에 들어왔으면 방에 들어와야지 거실에서 잤어요? 늦는다고 연락만 하고 안 들어오길래 회사에 중요한 일인가 싶었는데 언제 들어와 소파에서 자고 있어요?'
아내의 핀잔이 섞인 애정의 잔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아침이었다.
급하게 눈을 비비고 아내의 얼굴부터 살폈다. 방금 일어난 듯 슬립가운을 입은 아내는 머리를 뒤로 묶은 평범한 아침의 모습으로 내 엉덩이를 때리며 야단을 치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아이가 엄마를 안고 떼쓰는 것처럼 아내를 안고 울었다. 펑펑 운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아내가 당황해서 피하려다 매달리는 나를 보며 가만히 품어준다. 따뜻한 가슴에 내 머리를 묻고 쓰다듬어준다. 난 계속 울었다.
그렇게 숨이 잦아들고 아내를 보았다. 걱정과 안쓰러움이 그득한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여자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20년 전 그 나무 아래서 했던 첫 키스처럼.
아내의 부드러운 입술의 느낌이 사라지고 귀에 들리는 한마디.
'당신, 그 강가에서 했던 첫 키스 같은 느낌은 여전하네요.' 수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아내. 누가 그녀에게 50이 넘었다고 할까? 나는 내심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깐! 우리의 첫 키스는 어느 가을 떠났던 여행길의 시골 버드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며 나누었던 그때였는데? 아내는 지금 갈대숲 사이의 강가를 말하고 있다. 아내는 어제의 모습과 다를 뿐 내 기억 속의 아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녀의 남편이고 우리는 사랑을 확인했다. 아니, 확인했다고 믿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한마디. '아버지, 벌써 나가셔요?' 아들의 놀란 듯한 물음. 동시에 주방 쪽에서 카랑한 목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아들, 넌 절대 아빠 닮지 마라. 어제 들어오셔서 옷도 안 갈아입고 거실에서 그대로 주무시고 방금 엄마가 깨우니까 일어나셨다. 오늘 너희 아빠 진짜 별일이시다.'
'아들?' 뒤를 돌아보았다. 영락없는 휴가 나온 군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어젯밤의 북풍을 두른 딸아이는? 지금 눈앞의 아들놈이 원래 내 자식이 맞지만 어제 봤던 차가운 딸아이는? 지금 보는 아들은 이전의 아들 그대로일까? 내가 본 딸은 누구지? 아들놈이 나온 방문이 뒤로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분명 하트와 아기자기한 장식이 차가운 북풍 한가운데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은? 단조로운 '휴식 중' 팻말만이 달랑거리고 있을 뿐.
섞였다. 무자비하게. 뭔가를 잡아야 하는데, 무엇을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오늘 아침 이 집에서 낯섦을 인지하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 그렇다면 나는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좋다. 지금이 나의 일상이다. 다른 건 다 꿈이었다. 오히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아내와 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때만큼은.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은 후 아들에게 저녁에 맛집을 찾아가자고 말하고 출근길에 올랐다. 오늘 아침은 아내와 함께 내 차를 타고 움직였다. 아내가 아침의 기억인지 출근 전부터 데이트 기분을 내고 싶다는 억지를 부리기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함께 차에 올랐다. 특별한 날이 아니고선 항상 출근은 각자의 차로 움직였다. 지난 주말 이후 월요일 아침이 바로 그 이유 없는 특별한 날이었고.
평소보다 좀 늦은 시간이기에 아내의 회사에 들렀다 가려면 길을 서둘러야 했다. 익숙하게 내비게이션을 검색하고 아내의 회사를 찍었다. 어! 우리 회사가 찍힌다. 즐겨찾기의 아내 회사인데 우리 회사가 찍힌다. 이제는 이상하지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 외근 없나 봐? 차 없어도 되는 건가?', '오늘은 사무실에서 할 일이 태산이에요. 아침에 덜 피곤하려고 당신 차 타는 거예요. 왜요? 운전기사 하시려니 괜히 억울하시나요?' 아내의 장난스러운 대꾸가 너무 자연스럽다.
일단 차를 몰았다. 잠시 후 그 교차로가 나타났다. 회사를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그 교차로. 지난 월요일은 아내가 없었고 오늘은 같은 회사를 다니는 아내가 함께한다. 조금 긴 신호를 기다린 뒤 교차로를 지나쳤다. 순간 지난번의 위화감이 다시 한번 엷은 막과 같은 느낌으로 나를 덮쳐왔다. 옆자리의 아내를 보았다. 창에 기댄 팔에 턱을 괴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만 그랬다.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은 오직 나였다.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어긋난 것은 무엇일까? 시간? 공간? 관계? 존재? 조심하라는 아내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내렸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내가 가야 할 층을 눌렀다. 옆에 있는 아내는 다른 층을 누르지 않는다. 현재는 같은 층의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가 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했다. 아내가 나를 계속 따라온다. 어? 왜?
사무실에 들어서며 자리로 향하는 뒤로 직원들의 인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홍 과장님.'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누구? 홍 과장? 누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가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다들 좋은 아침이에요.' 진짜 홍 과장이다. 내 아내인데, 홍 과장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지나치며 내 귀에 속삭인 한마디. '오늘은 많이 변한 것 같죠? 부장님! 아니, 여보.'
- 3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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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
* 엄마는 웃었을까?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할때 부터 엄마의 말은 항상 '주의'였다.
'조심해라', '배려해라', '떼쓰지 마라', '필요한 것은 정확히 표현해라' 등등.
이제 말을 알아듣고 옹알대는 아이가 무엇을 알았을까? 하지만 엄마는 내 기억이 시작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잘했다는 말보다는 항상 '주의'가 앞섰다.
그래서일까? 난 처음 맘 먹은 방향성이 결과를 향할때 크게 꺾이는 경험을 한적이 없다.
엄마의 '주의'가 날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나에게 원한건 변하지 않는 '항상성'이라 판단하기 시작한건 국민학교 4학년이 끝나갈 때였다.
그때부터 였다. 누가 뭐래도 한번 정한것을 바꾸지 않는 성격으로 굳어 진것이. 대신 결정하기전에 오랜 사고를 하는 것은 자연히 따라오는 부차적인 선물 이었다.
명절날 온 친척들이 모일때 였다. 고모중 한 분이 나를 포함한 모든 사촌 형제들을 모아놓고 '오늘은 원하는 모든것을 하나씩 사주마!' 라고 하셨다. 나를 제외한 모든 형제들은 신이나서 이거요, 저거요.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결정을 못했다. 왜냐고? 한번 정하면 바꿀수 없기에. 뭐든 사준다고 했으니 하나를 정하는게 그리 쉬울리가? 하지만 동년배의 형제들은 형, 누나, 동생 할것 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그에 걸맞는 돈을 받아갔다.
결국은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나였다. 고모가 물었다. '너는 왜 말을 안하니?' 뭐라 할말이 없었다. 그 때는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에. 하지만 딱 한마디를 했던 기억이 있다. '한번 말하면 끝이잖아요?' 그 이후였나? 친척들에게 나는 속 깊은 아이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옆에 계시던 엄마는 딱 한마디만 하셨다. '잘 생각하렴.'
중학생이 되었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특별반'에도 뽑히며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 때도 엄마는 말씀 하셨다. '지금 할 수 있는 너의 것을 찾으렴. 성적만으로 너를 말 할 수 없단다.' 그때는 공부잘하는 아이가 학교에서 최고이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또 다른 세계가 열렸고 나는 중창단 음악활동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엄마는 말했다.'너에게 맞는 다른 활동이 있지 않을까?'.
난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졸업때까지 최선을 다해 친구들과 노래했고 즐거웠다.
졸업 후 입시에 실패하고 방황 할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너는 생각이 깊으니 사고력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결정하면 어떨까?'
한참을 고민 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전문대를 진학했던 동창 녀석을 만나 우연하게 알게된 전문대 전자계산기 학과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그때도 엄마가 했던 말씀이 생각난다. '너가 진정 잘 할 수 있는거 맞니? 후회 안할 수 있어?'
난 대답하지 않았다. 내 행동이 항상 답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난 한번 정한 진로를 바꾸지 않았고 졸업 후 FA 계열의 F/W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그때쯤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사회생활도 삐걱대기 시작했고.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지만 힘들고 괴로웠다. 급여도 괜찮고 생활도 여유로웠다. 하지만 나는 아팠다. 정신이 병들었고 몸은 말라갔다.
몸을 가눌 힘도 없었던 엄마였지만 나를 볼때 마다 말씀 하셨다.
'늦지 않았어. 한번 결정했어도 다른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단다. 너에게 기회를 허락하렴.'
나는 내 선택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 끝까지 견뎠다.
그리고 어느날 엄마는 떠났다. 마지막 얼굴도 보지 못하고, 내가 해외 출장처에서 호텔에 걸려운 전화를 통해 들었다. 장례가 끝나고 입관하는 날 엄마를 마지막으로 뵈었다. 아무 표정없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엄마의 얼굴. 그때서야 이상함을 알았다. 아프시고 나이가 들었는데도 왜 엄마는 변한게 없지? 내가 세상을 인식 할때 부터 관에 누워계신 지금까지 내 기억속의 엄마는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서야 다시 떠올랐다. 항상 엄마는 나에게 '다른 선택이 있지 않을까'라고 넌지시 말씀 하셨음을. 어렸을때 인지했던 '주의'가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향 결정에 대한 '권유' 였음을. 엄마는 충분히 내 삶의 방향을 바꾸도록 영향을 끼칠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내 선택이 끝나면 존중 하셨다. 하지만 만족하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누워계신 지금도 아무 표정이 없으시다. 과연 엄마는 눈을 감으실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왜 지금 그것이 궁금하지?', '난 이제 엄마가 없는데?'........
- 중대장은 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대 배치 첫날은 놀라움의 시작이었다.
내가 군 생활을 했을때를 기억하면 여군이 실전 부대 지휘관인 경우가 드물었으니까.
맞다 배치 첫날, 전입신고때 봤던 그녀의 인상을 잊지 못한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지금도 그녀의 나이를 알수가 없다. 제대 이후로 만난적이 없으니까.), 여자 치고는 키가 컸다. 머리 끝이 내 눈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녀의 첫 마디도 딱 내가 그녀에게 받은 인상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었다. '너, 키가 참 크구나.'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중대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당연히 그녀와 매일, 하루종일 보는것이 일상이 되었고 자연스런 신상털기가 진행되었다.
별도의 면담도 필요없었고 내 선임또한 나를 뽑은 후 말년 휴가 다음 바로 제대를 해버려 소위 말하는 풀린 군생활을 시작했었다.
다만 중대장과의 자연스런 밀당은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고? 나는 그녀가 바라는 올바른 행정병이 아니었으니까.
선임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것도 아니고 문서와 중대장, 행보관이 유일한 업무 인수인계 루트였고 어떻게 업무를 하느냐는 문서대로 아니면 내 해석이 주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우리 중대 행보관은 무능의 극치였고 중대 부식 빼돌리기가 주특기인 사람이었다. 당연히 중대장과 만나는 일이 거의 없이 짱박히기가 일쑤였고 중대장은 초임 소위와 함께 거의 혼자서 고군분투하기가 일상이었다.
다행히 나는 일머리가 좀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중대장의 고군분투에 조금씩 도움이 되고 있을 무렵 나와 중대장은 중요한 성격과 관점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니, FM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융통성이 있었고, 나는 없었고.
그녀는 중대원들에게 천사 중대장이었으나 나는 싸가지없는 신병이었다.
매일 야근이었기에 다행히 내무반 생활에 터치가 있을 시간은 없었고 선임들도 벼르기만 할뿐 어쩔수가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왜 그렇게 나를 싫어 했냐고? -눈치없이 있는 그대로 간부명령 전달하기. 한번도 선임에게 명령 전달하며 굽신대본적이 없었다. 난 명령을 전달하는 거였으니까. -근무조정이나 휴가일정 편의 봐주기등은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선임, 특히 병장들에게는 기회가 오면 죽인다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나는 업무가 우선이었기에 선임의 가벼운 질문도 차마 답을 못하고 지나칠때가 종종 있었는데 선임들에게는 쌓인 감정 때문에라도 더더욱 싸가지 없는 신병이었다. -마지막으로 쓰레기 행보관이었어도 어쨌든 부대내 살림꾼이었는데도 나는 종종 중대장 직보가 습관이었다. 그러니 적이 되어버린 행보관이 다른 병들과 함께 나를 묻는거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내 기억이 이럴진데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특히 중대장은 그런 나를 보며 한숨쉬기가 일상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해줄수 있는 최선이 야근을 시키면서 점호 빼주기 였을정도로. 그러면서 항상 이야기 했다. 'P이병, 눈치가 그렇게 없니? 그럴땐 그러면 안돼. 일 잘하는것과 눈치없는건 다른거야. 그럴땐 이렇게, 저렇게 하는거야.' 일상이 그녀의 충고였고. 난 '알았다' 답하면서도 변함없이 나의 일에만 충실했다. 그녀가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도 모를정도로.
시간이 흘러 상병 꺾일때가 되었고 내 후임들도 많아 졌다. 하지만 나의 생활은 전혀 변함이 없었고 그로인한 고립은 점점 심해져 갔다. 그럴때 마다 중대장은 거의 누나가 된것처럼 나에게 말해 주었다. 'P상병아! 이제는 짬밥도 먹었고 후임도 생겼는데 눈치가 아니라 경험이 쌓이지 않았니? 난 너가 좀더 전우들과 어울리면 좋겠어. 굽히지말고 어울리라고.'
난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국방부 시계는 돌아갔고 나도 내 전임과 마찬가지로 말년 휴가를 앞두고 후임을 뽑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업무 스타일을 그 친구가 배울새도 없이 전역을 했다. 누구도 내 전역을 축하해주거나 알아주지 않았기에 마지막 날까지 야근을 하고 제대 당일 새벽까지 업무를 보고 중대장에게 전역신고를 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부대에서 사라지려고 했었는데, 당일 새벽 그녀는 나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너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구나. 그전에도, 앞으로도.' 내 경례에 답하며 흘린 한마디가 왜 지금 기억이 나지?........
- 그 아이는 슬퍼했다.
아장 거리며 걸을때부터 우리는 함께였다.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엄마들은 고등학교부터 동창이었고 결혼도 같은 해에, 아이도 같은해, 같은 달에 너무 비슷한 삶을 아주 가까이서 살고 있었다. 사는 집이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라인이면 이미 할말이 없는 수준인거고.
엄마들은 우리를 남매처럼 키웠다. 같은 유치원 가기전부터 우리는 함께였고 유치원 입학 후 당연히 우리는 짝이 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안했지만 '얘들 둘이 결혼한데요.'가 그 어린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러울 정도 였으니까.
그애와 함께한 시간이 나쁘지는 않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엮이는 시선 자체가 싫었나 보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때 마다 나는 일단 주먹을 날렸다. 그냥 듣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싫은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우연일까? 무언가의 의도 였을까?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우리는 같은 반이었고 1학년때 짝이된 우리는 6년 내내 짝이었다. 당연히 유치원때의 놀림은 게속되었고 나의 반응은 역시 주먹이 먼저 나갔다. 그 아이가 싫지는 않았다. 심지어 엄마들은 '너희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 줄 아냐'고 매번 당신들끼리 주책부리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난 아이들의 놀림 아닌 놀림이 싫었고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렇게 6년이 지났다.
난 남중으로 그 아이는 여중으로 우리는 10년만에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뭐가 엮였던 걸까? 학년부터 시작한 아람단 활동의 자매결연 학교가 그 아이가 다니던 학교였고 뭐 당연한 듯이 그 아이도 아람단이었다. 이쯤되면 나도 뭔가 이상하다 느낄 법 했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우연히 국민학교 동창들이 그 활동에 끼어 있었고 우리는 여전히 오해 아닌 오해 속에서 헤어나올수가 없었다. 물론 그때마다 주먹이 먼저 나간건 말할 필요도 없고. 그때쯤 그 아이는 이미 숙녀티가 나는 예쁜 여자애였고 난 아직 치기어린 사춘기 남학생이었다는것. 왜 그 말이 그렇게 싫었을까? 다른 놈들이 그 아이에게 말을 거는것도 보기싫어 했으면서.
중학교 3년이 끝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난 실업계로 진학하려 했지만 엄마의 극구 만류로 인문계로 방향을 틀었고 그렇게 배정 받은 학교는, 맞다. 그녀와 같은 사학재단의 바로 옆 학교였다. 같은 라인에 살고 있고 바로 옆 학교에 다니니 아침 등교길이 겹치는 것은 당연하고 시간마저도 어떻게든 피해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그녀와 나는 동일한 시간에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야 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것은 남고와 여고의 심리적 거리가 컸던 시절이어서 하루를 끝내는 시간은 항상 같지는 않았고 중학교때처럼 이상한 이야기로 얽히는 경우도 없었다. 그때까지는.
음악시간이었다. 노래부르기 실기시험이었고 죽기보다 싫었지만 점수는 받아야 했기에 억지로 부른 노래가 문제가 될줄 누가 알았나? 시험이 끝나고 음악선생님이 따로 보자고 하셨고 나에게 학교 중창단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셨다. 엄마에게 물어본다고 하고 자리를 피했는데 매 음악시간마다 물어보는 선생님의 극성에 엄마에게 말씀드렸다. 사실 엄마는 내가 공부만 잘해주기를 바라셨고 그 기대를 저버린적은 없었기에 다른 것에 신경쓴다는 말을 하면 당연히 반대하실거라고 생각했다. 난 그 핑계로 음악선생님의 극성에서 빠져나가려고 했고. 엄마에게 안물어보고 거짓말을 할 수 있지 않았냐고? 낯 간지러운것도 싫었지만 난 거짓말도 죽기보다 싫었기에 진짜 행동이 따라야 했다. 하지만 내 기대는 보기좋게 빗나갔다. 엄마가 말하셨다. 그녀도 자기학교 중창단에 뽑혔다고. 우리학교와 중창단 결연이 되어 있으니 정말 잘되었다고 나보고 중창단에 들어가라 하셨다. 우리 둘이 함께 서있으면 너무 좋겠다고. 난 싫지 않았지만 엄마에게 화를 냈다. 그런말 하지 말라고. 엄마를 때릴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진담이 되어버린 내 상담의 결과는 그녀와의 고등학교 3년을 다시 엮게 만들었고 매년 말 중창 발표회를 위해 함께 연습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국민학교, 중학교의 인연이 소문이 났다. 결과야 말 안해도 다들 알겠지만 그 때와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는 놈은 나한테 맞았다. 아니 싸웠다가 맞겠지? 그런 일이 있던 어느날 우연히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나를 보는 눈이 슬펐다. 마구 눈물을 떨굴것 같은 큰 눈에 서글픈 슬픔이 가득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난 아직도 그녀가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니까.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공연을 하던날 우리들은 모두 함께 축하자리를 만들어 서로에게 밝은 미래와 그동안 즐거웠던 기억을 나누며 졸업 이후의 삶에 축복을 더했다. 그날도 그녀는 내 반대편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그녀의 눈을 피하며 친구들과 즐겁게 음료수를 마시고 떡볶이와 튀김을 마치 안주처럼 먹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된 그녀는 이전에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지었던 슬픈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16년은 끝났다. 나와 그녀는 서로 진학하는 대학이 달랐고 지역도 너무 떨어졌기에 졸업과 함께 진짜 이별 아닌 이별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집을 떠나던 날 아파트 앞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며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뒤돌아 서던 나에게 그녀는 한마디를 던졌다. 아주 슬프고 서러운 목소리로.
'넌 변하지 않는구나. 그전에도, 앞으로도.' 그 이후로 우리는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때 그녀는 나에게 뭘 보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지금 그녀의 기억이 떠오르지?...........
\*아내는 절규했다.
우리는 행복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 또한 내 사랑이 그녀 하나뿐임을 의심치 않았기에 우리는 행복했다.
하나뿐이지만 딸아이를 키우며 공주를 키우는 기분이 어떤지 알게 되었고, 그 공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또 다른 여자로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이 이렇게 행복한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 서로의 믿음과 사랑이 옅어진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20여년이 흐르는 동안 한번도 없었다. 적어도 그 날까지는.
4월의 벚꽃은 매년 같은 자리에 피는데, 그해는 왜인지 달라 보였다.
매번 둘만의 데이트를 요구하는 아내의 투정에 못이겨 찾아온 그곳. 아내의 제안으로 찾아와 함께 걷는 벚꽃나무 길.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라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한산했다. 꽃잎이 바람에 흩어지고, 아내가 내 팔을 잡고 걸었다. 평범한 봄 오후였다. 나는 아내의 체온을 느끼면서 걸었고, 머릿속은 오랜만에 여유로움으로 비어 있었다. 50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철없던 20대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하는 아내의 미소와 웃음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때 문득 머리속에 떠오른 한가지 기억.
"우리는 언젠가 지금과 같은 산책을 손잡고 했었는데?" 무의식속에서 입으로 나온 말에 아내는 평소의 장난기 그대로 나에게 받아쳤다.
"우리 여기 처음 왔는데? 당신 누구 다른 여자랑 왔었구나!"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내는 달랐나보다. '뭐야! 정말이야.' 그때까지는 장난이었다. 그때까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 아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없었고 아내는 다른방에서 잠을 잤다.
그날은 삐친 기분에 안좋아 보이는 과민한 반응으로 여겼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면서 아내는 더 말이 없어졌고 한달이 지날 무렵 나와는 얼굴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할말이 없었으니.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또 한달이 지났다.
아내는 눈에 띄게 말라갔다. 하지만 나는 뭔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왜 그런지 알수 없어서. 물어보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 아내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겠지 내가 필요하면 말하겠지. 우리는 그래왔으니까.
어느날 딸아이가 물어왔다. '아빠. 엄마가 요즘 이상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난 모른다고 답했다. 이어지는 딸아이의 대답이 의외였다. '실망이에요. 어떻게 아빠가 그럴수 있어요?' 뭐가? 내가 뭘? 하지만 계속되는 딸아이의 추궁. 나는 말을 멈췄다. 할말이 없으니 말을 멈춰야지.
그렇게 또 하루 하루가 지나고 어느날 퇴근 후 저녁, 문을 열고 들어간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스트레토 힐 한켤레. 아내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집안은 조용했다.
안방으로 향했다. 고개를 숙이고 침대에 걸쳐앉은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불을 켜자 흐트러진 화장에 엉망이된 얼굴로 울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다가가 가만히 어깨를 잡았다. 갑자기 절규하는 아내. '왜?', '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말이 없으니까.
20여년의 결혼 생활동안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 사랑은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 생각이 틀렸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걸까?
아내가 갑자기 변한 이유가 뭘까?
벚꽃이 흩날리던 그날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그녀는 그날 이후 무엇을 본걸까? 그리고 지금은 '왜?'를 절규하는 아내를 모르겠다. 그리고 그에 대해 말한마디 묻지 않는 나 또한 나를 모르겠다.
그렇게 울부짖는 아내를 무릎에 누이고 다독이는 사이 아내가 잠들었다, 살짝이 베개위로 누이고 거실로 나왔다. 잠시 후 딸아이가 돌아왔다. 곁을 지나가는 딸아이를 불러 세웠다. '엄마랑 이야기 해봤니?' 딸아이가 대답했다. '엄마가 그랬어요. 아빠는 변하지 않는다고. 그전에도, 앞으로도. 나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리고 자기방으로 들어가는 딸.
아내가 했다는 말. '내가 변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밤이 지났다. 아침 거실에 그대로 잠든 나를 조용히 아내가 깨웠다.
'당신, 기억하지 말았어야해요.'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는 아내. 그 이후로 난 아내를 볼 수 없었다.
딸아이 또한 어느날 독립을 선언하고 나갔다. 그렇게 혼자가 된 나. 왜 내가 혼자여야만 하지? 왜 나는 그녀를 잡지 않았지? 아내는 뭘 기억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한걸까? 그리고 지금 이 기억은 뭐지?
---
조용히 나를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홍과장, 아니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변할건가요?'
- 4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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